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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고 탄생 이야기

광주일고 탄생 이야기
(광주일고와 광주고 탄생의 비하인드 스토리)

                                                          김해곤(28회, 전 갑을방적 회장)
광주고등학교의 탄생

먼저 1947년도 광주서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려고 온 어린 학생들을 겁먹게 한 교문위의 플래카드를 보면 짓궂은 선배들이 써 놓은 말 “천재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 라는 위협 속에서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기쁨의 영광을 누릴 겨를도 없이 학교가 화재로 본관건물이 불타서 강당을 칸막이해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수기동 방향의 가건물에서 2학년을 공부하다가 3학년이 되면서 또, 난데없는 교육제도 변경으로 초, 중, 대, 6.6.4년 제도에서 초, 중, 고, 대, 6.3.3.4 및 6.4.2 제도를 병행하여 2년제 전문대를 신설, 빨리 고등교육 수료자를 사회에 진출시킴과 동시에 전국에 최고 우수고등학교 11개를 만들어 일본의 우수고등학교 수준을 능가하는 교육을 시키겠다는 취지로 광주서중학교 교정에 광주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었다.

당시는 중학교가 4~5년제에서 막 6년제로 변경된 후이니까 전라남도 전역(당시는 제주도도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음)에서 고등학교는 광주고등학교가 유일무이한 고등학교였다.
 
6.25로 변해버린 운명
– 광주서중 3년 수료자 중 90명과 전라남도 전역에서 선발한 20명
1950년도에 광주서중 3년 수료자 중 90명과 전라남도 전역에서 선발한 20명을 합쳐 110명을 문과 이과로 나누어 초일류 수업을 받고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하게 하였다.

당시의 모자와 모표는 오늘날의 광주일고와 같은 백선 2줄에 모표는 동일하고, 다만 뺏지는 사기 바탕에 흰색으로 일고라는 한자는 같으나 양쪽 끝이 위로 손을 든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교실은 양동 쪽 우리가 모자에 벽돌을 나르면서 지은 신관 2층에서 공부하다가 6.25 사변으로 인하여 7월23일까지 밖에 공부를 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당시 같은 교정에 서중학교 4학년생과 우리들 고등학교 1학년생이 같은 교문을 드나들게 되었으며, 규율부 학생 등은 서중학교 4~5학년 몫이었으니 타교에서 온 20명의 학생들 대부분은 억울하지만 동급생에게 경례를 하고 다녔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는 학생에 대해서는 채벌하는 우스운 수모를 당하는 꼴을 모면서 속앓이를 했던 추억이 어른거린다.

문제는 6.25 수복 후 발생하게 된다. 학제가 다시 바뀌어 초중고대 6.3.3.4제로 통일되며, 전국의 중고교를 완전 분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때 선배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여 광주서중 교정에 있는 광주고등학교를 내보내야지 역사와 전통 특히,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상지 광주서중을 밖으로 내보내기는 절대로 안 된다는 선배들의 강력한 주장에 광주고등학교가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여기서 짚어볼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첫째, 서울지구 4곳 즉 경기중 ․ 고, 서울중 ․ 고, 용산중 ․ 고, 경복중 ․ 고는 중고교를 분리하지 않고 끝내 버텼으며
둘째, 대전고등학교와 전주고등학교는 각각 중학교를 내보냄으로서 일제시대부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주북중은 전주고등학교가 그 자리에서 그 명성과 전통을 이어받아 전라북도 나아가 전국적 명문고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으며, 대전고등학교 역시 동일하게 대전중학교가 밖으로 나갔다.
 
반면 광주서중학교 교정에서 나가게 된 광주고등학교는 광주서중 선배의 힘에 의하여 일제시대의 한 맺힌 광주동중학교를 뿌리 채 없애기로 하고 그 자리로 광주고등학교를 옮기면서 동시에 학제변경의 원칙을 모두 수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1951년 봄 학기부터 광주서중 5학년생과 광주동중 5학년생은 광주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후에 광주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며, 광주고등학교 1학년생과 광주서중학교 4학년생, 광주동중학교 4학년생은 합쳐서 광주고등학교 2학년생이 되었으며, 광주서중학교 3학년생과 광동중학교 3학년생은 시험을 거쳐 광주고등학교 1학년생이 되고, 광주동중학교 2학년생과 1학년생은 전부 광주서중학교에 합쳐지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광주서중 6학년생은 제26회 6년제 졸업을 정상적으로 마치게 되었고, 광주서중 5학년생은 1951년도 광주서중 5년제 26회 졸업이 되었으며, 광주서중 4학년생은 광주서중 4년제 26회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끝내 받지 못한 졸업장
그러나 1947년 함께 입학하여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광주고등학교로 합격되어간 90명은 동급생인 서중 4학년과 함께 서중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있다가 1950년 서중 3년 수료생, 또는 1951년 4년 졸업생 등의 명단에 기재된 채 내려오고 있다.
당시의 고등학교를 광주서고 또는 구 광주고교, 구 광주일고 등으로 호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 광주동중 교정을 독차지한 광주고등학교는 당시의 1학년은 광주서중 3학년 학생과 광주동중 3학년 학생이 대부분 이었으나 1952년과 1953년이 되면서 광주서중 졸업생의 합격률이 많이 떨어지고 당시의 광주북성중학교를 비롯한 기타 중학교의 입학률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여기에 경기 서울지역의 고등학교가 중 ․ 고 분리를 하지 않고 버텨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선배들의 운동으로 다시금 광주서중학교 내에 고등학교설립을 추진하여 광주서중학교 교정에 고등학교가 생겼고, 모표와 백선 2개는 애당초 서중교정에 있었던 광주고등학교의 것을 사용하고 뺏지만은 변경된 것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3년 광주일고의 탄생과 함께 옛날 서중교정에 있던 광주고교생 90+20명의 학생들이 되돌아가려고도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서중에서 3학년을 마치고 서중교정 안에서 광주고교를 다녔던 90명의 학생으로서 이제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당시의 모교 즉, 지금의 광주일고에 대한 많은 향수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필자약력 : 28회, 전 (주)갑을방적 회장, 공학박사, 국제기술사

작성일 : 2013-02-1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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